By Joe Crews
소개
나는 최근 굳건한 믿음을 가진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인류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그의 생동감 있는 묘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내가 비행기에서 만난 진화론자였다.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현대의 동식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영겁의 선사시대를 이어나갔다. 작은 단세포 모나드로부터의 인간의 발생에 대한 그의 상세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 설득력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미세한 아메바가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직접 봤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종자들이 이토록 확고한 믿음을 가진 진화론은 과연 어떤 것인가? 어떻게 이 이론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다른 관점에 대해 그토록 독단적 반대자가 되게 만들었는가? 많은 진화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반하는 교실 수업을 금지하기 위해 그들의 전문적인 영향력을 모았다. 진화론은 반대 의견을 잠재우는 이런 광적인 지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종교인들이 어떠한 고유의 입장을 가지면 편견이라고 치부하지만 과학자들은 그런 비난을 피해가는 것 같다. 1977년 2월 거의 200명에 가까운 미국 학계 구성원들이 국가교육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학교 교실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대체 아이디어를 허용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것은 진화론자들이 자기들 이론의 고정관념적이고 모순됨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는 것에 위협을 느꼈음을 보여준다. 많은 학생들이 생명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찾고 있다. 진부한 진화론의 전통이 처음으로 방어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방어하려는지 살펴보자. 그러면 이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이 왜 그렇게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왜 그들이 학교 강단에서의 경쟁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연 발생
진화론자들이 모든 생명체가 진화했다고 추정되는 최초의 단세포 동물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여태껏 “자연 발생”이라는 구태한 개념이 받아들여져 온 해석이다. 웹스터에 의하면 자연 발생은 “무생물에서 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그것은) 부패한 유기 물질에서 유기체가 자연 발생했다는, 지금은 폐기되어버린 믿음에서 비롯됐다.”
간단히 말해서 온도, 시간, 장소 등의 적절한 조건 하에서 썩어가는 물질이 그냥 유기적인 생명체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단순한 아이디어는 1846년 루이 파스퇴르가 그의 실험으로 이 이론을 완전히 깨뜨릴 때까지 과학적 사고를 지배했다. 그는 이 개념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폭로했다. 통제된 실험 조건에서, 반진공 상태에 썩어가는 무생물에서 어떤 유기 생명체도 출현하지 않았다. 미련을 가졌겠지만 더이상 타당한 과학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 평판이 좋은 과학자들은 입증할 수 있는 근거로써 그것을 옹호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 점이 웹스터가 “지금은 폐기되었다”고 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시험관에서 결코 증명된 적이 없었으며, 결코 증명될 수도 없다. 자연 발생의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현재의 과정은 관찰되지 않는다. 분명히, 최초의 생명의 불꽃을 생산하기 위해 먼 과거에 자연 발생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생명을 지배하는 법칙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잠깐만! 이것 역시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전체 진화론은 지구의 조건이 여러 시대에 걸쳐 일정하게 유지되었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아메바, 혹은 모나드, 또는 생명의 최초 세포를 형성한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 진화론자들의 딜레마가 보이기 시작하는가? 만일 이것이 이전 어떠한 생명에서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면 전체 이론의 기초인 자연의 기본법칙에 위배된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이 자연 발생을 믿지 않는다면, 자연의 힘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즉 하나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버드 대학교의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 월드 박사는 진화론자들이 할 법한 모호하면서도 솔직한 진술을 한다:
“이 작업의 규모만 생각해 봐도 생명체의 자연 발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 이르렀다 - 나의 생각에는, 자연 발생의 결과로서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954년 8월호)
월드 박사의 진술은 종교적 창조론자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을 보여준다. 위대한 진화 과학자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고 말한 것에 주목하자.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창조론자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믿음은 그가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화론과 과학의 기본 법칙의 모순에 직면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그의 인본주의적 설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폭발적이고, 비과학적인 자연 발생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는 왜 성경에서 말하는 자연 발생을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어떤 경우라도 창조의 기적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신성한 명령으로 하셨거나, 맹목적이고 무지한 본성이 월드 박사의 불가능한 행동을 만들어 냈다. 합리적인 마음으로 잠시동안 대안을 숙고하자. 무한한 지성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기회가 생명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데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월드 박사는 왜 생명의 자연 발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는가? 명망있는 진화론자가 하기에는 쉬운 양보가 아니었다. 과학적인 설명에 대한 그의 철저한 탐구는 다른 모든 진화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났고, 그는 그것을 인정할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다. 그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은 순진하고 속기 쉬운 사람으로 분류될 것이다. 고등 교육의 망토는 쉽게 감동하는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가! 영감의 기록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얼마나 더 단순하고 더 유쾌한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우연한 생명 – 터무니 없는 개연성
살아있는 단세포가 우연히 발달하려면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까? 사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생명체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만든 어떠한 것보다 더 복잡하다. 뉴욕시의 전체 단지는 가장 단순하고 미세한 세포의 구성보다 덜 복잡하다. 우연에 의한 생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과학자들은 단세포의 구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고 확신한다. 분자가 아미노산으로 적절하게 결합된 다음, 생명의 특성을 가진 단백질로 만들어질 가능성이란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 잡지는 1955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이 시인했다:
“확률적 관점에서 보면, 현재 환경을 단일 아미노산 분자로 정렬하는 것은 지구 생명의 기원에 가능한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다.”
스위스의 수학자인 샤를 유진 귀는 실제로 10(160) 중 단 한번의 기회로 그러한 발생에 대한 확률을 계산했다. 그것은 10에 160으로 곱한 것을 의미하며, 표현하기에는 너무 큰 숫자이다. 또 다른 과학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단일 단백질 분자를 생성하기 위해 함께 흔들어야 하는 물질의 양은 전체 우주보다 수백만 배 더 많을 것이다. 그것이 지구에서 발생하는 데만 길고, 거의 끝없는, 수십억년이 필요할 것이다.” (우주 팽창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 23)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과학적 배경에 맞지 않는 어떤 것을 믿으려는 순진한 주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교육받은 사람들의 일반적으로 넓은 마음을 가진 관용과는 반대되게, 많은 진화 과학자들이 관점을 억누르려 편협하게 구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명백한 설명은 그러한 진화론자들이 독단적 진리의 유일한 배포자로서의 평판을 유지하려는 절박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우월한 지혜를 인정하는 것은 진화론자 공동체에 의해 너무 오랫동안 구축되어 왔다.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억측을 반복한 나머지,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추측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스스로의 추측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테지만, 모든 과학적 증거에 반하는 현상을 추정하면서 여전히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돌연변이 – 어느 만큼의 변화인가?
과학적 법칙에 위배되는 두번째 기초 진화론적 가르침을 살펴보자. 아메바를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제공한다고 여겨지는 진화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돌연변이다. 이것은 유전자 자체의 화학적 변화에 의해 야기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기체의 비정상적인 변화를 말한다. 유전자는 각 종의 염색체 내에 있는 유전인자이다. 모든 종은 유전자를 포함하는 고유한 수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약 100,000개의 유전자를 가진 46개의 염색체가 있으며, 각 유전자는 개인의 크기, 색깔, 질감, 혹은 품질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을 제공하는 이러한 유전자가 때때로 특이한 유전자의 조합, 화학적 손상 또는 기타 영향에 의해 영향을 받아 자손 중 하나에서 비정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것을 돌연변이라고 한다. 진화론자들은 돌연변이를 통해 다양한 종에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는데, 아메바가 무척추동물, 양서류, 파충류, 네 발 달린 동물, 유인원 형태, 그리고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종은 진화론자들의 눈에는 정의되어 있지 않다. 가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원히 또 다른 더 높은 형태로 표류하고 있다. 이것은 동물 역사의 모든 화석 기록에 정확한 가족의 경계가 없음을 밝혀야 함을 의미한다. 말그대로 수억 마리의 반쯤 발달한 물고기가 양서류로, 파충류가 반쯤 변이하거나, 포유류가 반은 유인원이나 반은 사람처럼 보이는 등 모두가 다른 것으로 변하는 과정에 있어야 한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수십억 개의 혼란스러운 가족 화석을 찾는 대신 정 반대의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표류하고 변화하는 생명체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 모든 것들은 자신의 기본적 종자의 잘 정의된 한계 내에 머물며, 이것은 현대 진화론자의 요구사항에 절대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처럼 압도적이고 힘이 빠지는 타격을 당하면 자기의 이론을 포기하거나 바꿀테지만, 진화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100%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찾기 힘든 끊어진 고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이 그들의 이론에 필요한 급격한 변화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의존해 온 매개체를 살펴보자. 진화론의 대표적인 대변인이었던 줄리언 헉슬리 경은 “돌연변이는 진화론의 원재료를 제공한다” 그리고 “돌연변이는 모든 유전 변이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행동하는 진화론, 38)
진화론자들의 또 다른 리더였던 언스트 마이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연변이가 자연 개체군에서 발견되는 모든 유전적 변이의 궁극적인 원인이며 자연 선택이 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원재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물 종과 진화론, 170)
다음 사항을 분명히 명심하자. 진화론자들은 돌연변이가 단순한 형태를 더 복잡한 형태로 바꾸는 종의 끊임없는 개량을 해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돌연변이가 진화에 요구되는 것들을 결코 달성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하듯이, 돌연변이는 매우 드물다. 헉슬리는 십만명 중 한명만이 돌연변이라고 추정한다. 둘째, 그것이 발생할 때 유기체에 해롭거나 치명적임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돌연변이의 대다수는 진화가 아닌 멸종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유기체를 좋게 만드는 대신 더 나쁘게 만든다. 헉슬리는 “대대수의 돌연변이 유전자는 유기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동물 종과 진화론, 39)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윈 자신을 포함한 다른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열성이며 퇴행성임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유기체에 상당한 개선을 가져오기 보다는 자연 선택에 의해 실제로 소멸될 것이다. 진화론의 엘리트 대변인 중 한명인 G. G. 심슨 교수는 다중 동시 돌연변이에 대해 글을 썼고, 좋은 진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수학적 가능성을 따지면 2740억년에 한번 발생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것은 매일 새로운 세대를 재생산하는 1억 명의 개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의 이야기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분명히 … 그러한 과정은 진화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진화의 주요 특징, 96)
이 말이 혼란스럽게 들리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요구하는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돌연변이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다중 돌연변이가 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의 진화론 친구들이 폐기된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만든 너무 아리송한 말돌리기나 화제 전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돌연변이는 기본적인 종류 내에서의 작은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한 변화는 제한적이고, 결코 새로운 가족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식물과 동물의 여러 품종에 대한 설명일 수는 있지만 진화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종의 창조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화석은 창조론을 지지한다
화석의 기록들은 종들이 다른 종으로 점진적 변이한다는 이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으니 화석의 증거가 성경과 일치하는지 살펴보자. 창세기에 하나님의 피조물이 “그 종류대로” 번식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10번 명령하신 것을 읽을 수 있다. “종류”라는 단어는 종 또는 가족(과,科)을 의미한다. 창조된 각 가족은 자신의 종류만 생산해야만 했다. 이것은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생물진화에 요구되는 멀어지거나 변질되는 과정을 영원히 배제시킨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과(family) 안에서는 변화가 없을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종류의 개, 고양이, 말 등등을 창조하지 않았다. 각 종에는 암수 한 마리만 있었고, 그 이후로 많은 변화가 발생하여 과(family) 내에서 다양한 품종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항상 고양이로 남아있고, 개는 여전히 개이고, 사람도 여전히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돌연변이는 같은 종의 새로운 변종을 생산하는 것의 원인일 수는 있지만 전혀 새로운 종을 생성하지는 않는다. 선택적 번식은 또한 뿔 없는 소, 흰 칠면조, 씨 없는 오렌지와 같은 엄청난 개량을 가져왔지만 모든 유기체는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명하신 그대로 – 그 종류대로 – 계속 번식했다.
진화가 요구하는 “공통 조상”은 존재한 적이 없다. “멸실환”(진화 과정에서 유인원과 인간 사이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화석은 발견되지 않은 동물-역자주)은 없었다. 인간과 원숭이는 같은 동물 조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침팬지와 많은 원숭이 그룹도 엄청 다양하다. 일부는 똑똑하고 일부는 그렇지 못하다. 일부는 꼬리가 짧고 일부는 길다. 일부는 꼬리가 아예 없다. 치아의 개수도 다르다. 몇몇은 엄지손가락이 있고 다른 종은 없다. 유전자도 다르다. 그들의 피도 다르고 염색체가 일치하지도 않는다. 흥미롭게도 고릴라는 고릴라끼리만 번식하고, 침팬지는 침팬지와, 원숭이는 원숭이와만 번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과 원숭이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유인원 유형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더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을 발견한다. 사실 이러한 차이는 “그 종류대로”라는 성경의 법칙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반박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 일부 원숭이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거나 스쿠터를 타거나 심지어 실험실에서 실험관을 들어올리도록 훈련될 수 있다는 사실이, 과학자가 진화된 동물이라거나 원숭이가 발달장애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진화론자들은 화석의 기록이 그들의 종의 변화 이론을 뒷받침해 줄 것을 기대했었다고 이미 언급했다. 그들의 정론으로는 엄청난 수의 비늘 파충류가 비늘을 깃털로, 앞발은 날개로 변형되어야 했다. 다른 파충류는 아마도 털을 가진 네 발 달린 동물로 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수천 개의 다양한 변화하고 있는 생물을 찾아냈는가? 어떤 특정 지층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모든 화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쉽게 식별되었고 각 과의 종류대로 구분되었다.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지층은 둘 이상의 종의 결합 특징을 가진 수억 개의 전이 형태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지금 바로 관찰할 수 있는 더 높은 형태로 변하는 과정에 있는 수백만 개의 살아있는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한다. 다윈은 고백했다:
“이 땅에는 200만에서 300만 종이 있다. 관찰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분야이다; 그러나 훈련된 관찰자들의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화가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늘날 말해야 한다.” (생애 그리고 편지 3권, 25)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렇다면 왜 그러한 주장을 고집하는가? 이것은 전해져온 이론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태도 중 하나이다.
가장 아래 화석층의 고대 화석 형태조차도 현대의 대응물과 동일한 특징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으며, 진화론자들이 여기에 놀라움의 외침을 보내는 것은 흥미로울 뿐이다. 창조론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성경이 그렇게 될 것이라 말했고, 모순된 증거에 의해 당황해 할 상황에 처하지도 않는다. 빈 지층대의 불가사의
가여운 진화론자들이 겪은 또다른 좌절은 빈 지층이라는 낯선 분야이다. 땅 속 깊이 파고들면 지층이 층층이 하나씩 드러난다. 종종 우리는 산의 옆부분이나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든 부분에 이러한 층이 명확하게 노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질학자들은 연속적으로 쌓인 지층에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어, 그랜드 캐년으로 내려가면 과학자들이 붙인 이름인 미시시피, 대본기, 캄브리아기 등을 지나며 아래로 이동한다.
진화론자들에게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캄브리아기는 화석이 있는 하강층의 마지막 지층이다. 캄브리아기 아래의 모든 하위 지층은 박테리아와 조류와 같은 일부 단세포 유형을 제외하고는 생명에 대한 화석 기록이 전혀 없다. 왜 그럴까? 캄브리아기 층은 척추동물을 제외하고 오늘날 발견되는 모든 주요 동물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화석의 구조에는 원시적인 것이 전혀 없다. 기본적으로 그것들은 현재 살아있는 생물만큼의 복잡성을 가진다. 그러나 중대한 질문이 있다: 그들의 조상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고도로 발달된 화석으로 이어졌어야 할 모든 진화하는 생물은 어디에 있는가? 진화론에 따르면 선캄브리아기 지층은 위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캄브리아기 화석의 더 원시적인 형태로 채워졌어야만 한다.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캄브리아기 체계 이전의 가장 이른 시기의 풍부한 화석 퇴적물을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질문에 나는 만족할 만한 답을 줄 수 없다… 현재의 이 사건은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제시된 견해에 반대하는 유효한 논의로써 확고하게 주장될 수 있다.” (종의 기원, 309)
매우 놀랍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입증될 수 없음을 인정했지만, 그는 여전히 반박할 수 없는 주장에 맞추어 자신의 이론을 조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 많은 진화 과학자들도 비슷한 실망과 좌절을 토로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다니엘 엑세리오드 박사는 이것을 “지질학과 진화의 주요 미해결 문제 중 하나이다” 라고 말했다. (사이언스, 1958년 7월 4일자)
미국 국립 박물관의 오스틴 클라크 박사는 캄브리아기 화석에 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연체동물은 틀림없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연체동물이었다.” (새로운 진화: 동물발생, 101쪽)
콜롬비아 대학의 마샬 케이와 에드윈 코버트 박사는 이 문제를 놓고 놀라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그러한 복잡한 유기물 형태가 약 6억년 된 암석에는 존재하고 이전 20억년의 기록에는 찾을 수 없거나 인식되지 않았어야 하는가? 만일 생명의 진화가 있었다고 했을 때, 캄브리아기보다 오래된 암석에 필수 화석들이 없다는 사실은 당혹스럽다.” (층서학과 생활사, 102쪽)
“진화의 왕자”인 조지 게이로드 심슨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생명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화석 기록 전체의 가장 불가사의한 특징일 뿐만 아니라 가장 명백한 불충분성이기도 하다.” (생명의 진화, 144쪽)
이렇게 과학적 증거의 근거를 찾지 못했음을 억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면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불안정한 견해를 어쩜 그렇게 독단적으로 계속 밀어붙일 수 있는가? 학생들이 반대되는 주장을 듣지 못하도록 다투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의 입장은 정직한 연구에 대한 공정한 조사를 하면 무너져 버릴 것이다.
선캄브리아기 화석의 부재는 진화론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 즉 모든 주요 피조물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창조 역사로 눈돌리게 한다. 창조론이 비과학적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참된 증거의 부재를 위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리적 과학 데이터의 우위는 진화가 아니라 창조의 편에 있다. 균일성 또는 홍수?
지층층이라는 주제는 이 지층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진화론자들이 지층의 나이를 왜 수십억 년으로 추정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층의 연대 측정은 균일성 이론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이 이론은 과거에 작용했던 모든 자연 과정이 오늘날과 똑같이 작동했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지층의 생성은 우리가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기준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퇴적물이 1피트 깊이의 지층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그러면 그 연대는 아무리 지구 내부 깊숙히 위치하든 상관없이 모두 12인치의 층을 할당받는다.
이것이 유효한 가정일까? 과거의 모든 자연의 힘은 현재 우리에게 작용되고 이해되는 것과 같은 힘인가? 우리의 제한적인 관찰력과 경험으로 과거의 시대를 안주하는 것은 얼마나 순진하고 교만한 일인지! 우리는 원하는 대로 넘겨짚을 수는 있지만, 스스로 속아 넘어갈 뿐 어느 것 하나 증명해내지 못한다. 성경은 가장 높은 산도 덮어버리고 방주 이외의 모든 동식물을 완전히 파괴해 지구 표면을 황폐화 시켜버린 홍수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설명했다. 홍수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세기 7:11,12)
그러한 지층의 존재는 성경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게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창세기의 전 지구적 홍수는 진화론의 추측보다 지층에 대한 훨씬 더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물이 땅에서 물러남에 따라 강력한 조수와 해류가 단기간에 거대한 협곡을 깎아냈다. 고유의 무게에 따라, 잔해층이 쌓여 식물과 동물 생명들이 조밀한 이음새나 지층으로 압축됐다. 이렇게 되어야만 전 세계의 방대한 석유 매장과 석탄층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된다. 이것은 식물과 동물의 사체가 고열과 고압에 의해 묻힌 결과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화석화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현대 작용하는 자연의 힘에 의해서는 석유나 석탄이 형성되지 않는다. 균일성이 없다.
진실은, 수백만 톤의 식물과 동물의 생명이 죽고 매장당하는 거대한 대격변의 자연 전복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 이상의 지층을 통해 똑바로 서있는 일부 화석의 자세는 그 과정이 느리거나 오래 걸리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재료는 동물의 몸 주위에 빠르게 쌓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이 직립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홍수로 인해 수백만 마리의 물고기가 묻혔고, 그 중 많은 물고기가 갑자기 놀라운 힘에 휩싸인 것처럼 뒤틀렸다. 해양 화석이 가장 높은 산맥에서 발견된 적도 있고, 다른 과학적 증거들에 대한 지표도 지구 전체에 걸친 전 지구적 홍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적자 생존
“자연 선택”은 적자 생존을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자들이 만든 신조어이다. 간단히 말해 각 세대에서 가장 강한 종이 살아남고, 더 약하고 적응이 잘 안된 종이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말이다. 진화의 가정은 가장 강한 것만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종은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진화적 규모에서 더 고도로 발전된 상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 선택이 그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다. 오늘날의 진화론의 최고 교사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질문에 절망적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줄리안 헉슬리 경은 다음 진술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을 믿었다:
“우리가 아는 한… 자연선택은… 진화에서 작용하는 것 중 유일하게 효과적이다.” (진행중인 진화론, 36)
그는 이 분야의 또 다른 헤비급 선수인 어니스트 메이어 박사와 이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자연 선택은 더 이상 전부 아니면 전무 과정으로 간주되지 않고 순전히 통계적 개념으로 간주된다.” (동물의 종, 7)
오늘날의 이론의 최고의 해석자로 간주되는 G. G. 심슨은 이러한 반대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말하기를, “진화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포기됐다. 이제 진화에는 어떠한 원인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진화의 지리학, 17).
어찌됐든 과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화에 관한 큰 일치와 합의에 대한 글을 보면 그 어떠한 주장도 믿지 말라. 다들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새로운 추상적 가능성을 바쁘게 실험한 후, 점점 더 엉망이 되어버리면 이내 포기한다. 그들이 동의하는 한가지 기본 원칙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은 신성한 창조의 명령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자연 선택 문제로 돌아가보자. 아메바에서 인간으로의 전환과 관련된 모든 변화를 실제로 재현할 수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작은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때, 진화론의 대변인들은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화려한 의미론적 대응을 보여주며 가장 놀라운 시인을 한다. 심슨은 자연 선택을 진실이라고 지지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증거가 부족함을 인식했다:
“이 이론은 그다지 입증되지 못했으며 단지 추상적 지위만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진화의 주요 특징, 118, 119)
그러나 그것에 대한 헉슬리의 순환 논리를 들어보라. 그는 말한다:
”우리의 현재의 지식에 기초하여 자연 선택이 유전적 적응을 낳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유전적 적응은 자연 선택의 효율성에 대한 추정상의 증거이다.” (진화의 실제, 48)
여러분은 이 논리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연 선택에 대한 헉슬리의 증거는 유기체의 적응 또는 변화이지만, 그 변화는 자연 선택에 의해 생성된다. 즉, A=B; 그러므로 B=A란 것이다. 그의 “증거”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변화가 자연 선택에 의해 생성되었나? 아니면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 선택을 고안해낸 것인가? 차라리 변화가 자연 선택 이론을 낳았다고 하는게 맞을 수도 있겠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종에서 종으로의 변화조차 검증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미 보여준 것처럼 어떤 종이 다른 종으로 변했다는 화석 증거나 살아있는 증거는 단 한 조각도 없다. 그래서 헉슬리의 자연 선택에 대한 증거는 결코 일어나지 않은 변화이고, 그 일어나지 않은 변화는 자연 선택에 대한 증거로 제시된다. 확실히 이것은 과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공허한 논리이다.
하지만 이 자연 선택 과정의 신뢰성에 대한 헉슬리 줄리안 경의 설명을 계속 보자:
“요약하자면, 자연 선택은 무작위성을 방향성으로, 맹목적인 우연성을 뚜렷한 목적으로 변환한다. 시간의 도움을 받아 삶의 조직을 개선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달성할 수 없었을 천문학적 불가능의 결과를 생성해낸다.” (진화의 실제, 54, 55)
마지막 문장의 강조를 놓치지 말자. 자연 선택에 의해 일어난 진화적 변화는 “천문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우리 친구 헉슬리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 천문학적 불가능을 믿는 것이다. 가엾은 사람! 그가 말한 오늘날의 복잡한 생명의 질서를 다른 방법으로는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 것은 틀렸다. 하나님은 세포와 유전자의 경이로움을,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수백만 가지의 과정들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줄리안 경은 신성한 창조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이 복잡한 생물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기적적인 과정을 지어내야만 했다. 그의 “자연 선택” 신의 전능함을 설명하기 위해 헉슬리는 그러한 과정의 확률을 계산했다. 이 계산은 말 한마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되는 진화적 인자의 가능 여부를 놓고 수행되었다. 이제부터는 모두 자연, 시간, 돌연변이 및 자연 선택의 작용을 통해 이뤄지는 우연의 발전임을 주지하자. 그의 책 “진화의 과정”에서 헉슬리는 확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숫자 1 뒤에 0이 300만 개가 따라오게 하려면 500페이지 짜리 책 세권 분량으로 인쇄를 해야 할 것이다! … 이러한 현실성 없는 사건에 내기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지만, 사실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진화의 과정, 46)
우리는 이전에 불가능을 믿는 진화론자들의 믿음에 대해 논평했었다. 이 복합 확률의 수치는 사실상 0이므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도 없는 과학적 정신이 어떻게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는데는 그렇게 독단적일 수 있는 것일까? 헉슬리는 왜 자신의 이론이 작동할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 공식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을 강조하기 위해 수치를 사용했을 것이다. 거듭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 간증을 할 기회를 찾는 것처럼, 헉슬리도 신의 진화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의 관점을 확대하기 위해 그의 이론의 과학적 가능성을 무너뜨렸다.
마샬과 산드라 홀은 자신들의 저서 “진실–하나님 혹은 진화론?”(The Truth-God or Evolution?)에서 말의 우연한 생산에 대한 헉슬리의 터무니없는 믿음에 관한 그들의 반응을 공유한다. 그것은 진화가 실제로 과학 시험에서 낙제했다는 적절한 증거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리고(헉슬리가 당신에게 호언장담하더라도) 이 수치가 말의 진화를 위해 계산되었다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주겠다! 헉슬리가 인간을 생산하려면 몇 개의 0이 더 필요한가? 그러면 말 한마리와 인간 한명만 있을 것이고, 수학자가 말과 사람을 지탱하는 데 더 필요한 모든 식물과 동물의 진화 가능성을 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느 쪽도 진화의 어떠한 단계에서 살아남은 수 없는 불모의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숫자 1 다음에 수천 개의 0이 있는가? 그런 다음 생명에 필요한 모든 특성을 내장하고 있는 지구의 비개연성에 대해 1천을 추가한다. 그리고 태양과 달과 별의 개연성을 위해 1천을 더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생각의 진화, 불가해한 우주의 맥박의 일부처럼 우리 안에서 밀물과 썰물이 흐르는 모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현실을 위해 다른 수천을 추가하라!
“그것들을 모두 더하면 과학적 증거는 커녕 이성적 사고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벌써 중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슨, 헉슬리, 도브잔스키, 메이어 및 수십 명의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것이 있어야 할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진화론에 일말의 형식으로 신빙성을 주던 모든 요점으로부터 후퇴했다. 이제 그들은 인구 유전학, 기회적 부동, 고립 그리고 다른 계책 등을 기초로 한 심오한 수학적 공식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지구상의 생명에 기여하는 가능성은 마이너스 영보다 적다. 그런 것들이 우리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죽은지 10년도 더 된 죽은 이론의 형체를 도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시키고 있다.
“진화는 과학이라는 주장이 전혀 없다.
“이 모든 말도 안되는 일들은 중단되어야 한다. 이제는 시체를 묻어야 할 때이다. 이제는 진화론 관련 서적들을 도서관의 유머러스한 소설 섹션으로 옮길 때이다.” (진실–하나님 혹은 진화론? 39, 40)
이러한 진화론적 어리석음의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창조론적 믿음에 대해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고학력의 진화론자들의 거창하게 들리는 기술적 언어에 위축되어 왔으며, 그들 중 다수는 특별히 창조에 대해 신랄히 공격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화론의 허점을 폭로하는 데 대한 더 많은 정보이다. 그것의 기반은 비과학적인 불일치로 가득 차 있으며 종종 과학적 전문 용어의 괴상한 용어 뒤에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아담의 아들들을 통해 우리의 조상을 추적하는 것이 습지를 뒤져가며 단세포 조상님 따위를 찾는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다. 인류는 심지어 우리 살아생전에도 도덕적 타락과 폭력적 혼돈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은 이 기이한 행동의 대부분에 대한 변명으로써 동물 조상을 들먹인다. 어떻게 사람의 행동이 야수의 유전자와 염색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합리화는 일시적 심신미약주장처럼 더 무책임한 행동으로 뻗어가는 핑계거리를 제공한다. 악의 참된 원인과 참된 치유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발견된다. 죄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혔으며, 완전하신 구세주와의 개인적인 만남만이 악의 문제를 반전시킬 것이다.